지금 여기, 한수정

초록 동행

자연이 걸어온 시간의 흔적을
가까이에 두는 일

자연이 걸어온 시간의 흔적을 가까이에 두는 일

분재 전문가 유수형 교수

들판의 멀쩡한 나무보다 절벽과 암반처럼 혹독한 자리에서 살아남은 나무가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척박함을 견디고도 잎을 틔우는 자연의 힘이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분재는 그러한 자연의 생애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압축해 보여준다. 살아 있는 가지와 말라버린 줄기의 흔적이 함께 뒤엉켜 하나의 생애를 품는 모습. 유수형 교수는 “분재의 본질은 결국 자연”이라고 말한다. 자연을 조금 더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 척박함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생명의 모습. 그 이야기가 한수정이 지향하는 수목원·정원의 철학과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주인공 만수(이병헌)의 온실 속 분재
10여 년 전 유수형 교수가 스승의 나무로 만든 분재. 영화에서 특별한 장면을 만들어냈다. ⓒ유수형

영화 어쩔수가없다 속 분재

유수형 교수의 이력은 조금 특이하다. 분재로 시작해 조경과 수목원의 마스터플랜까지 영역을 넓혔고, 또 갤러리, 영화, 예술, 패션 브랜드와 협업하며 활동 범위를 확장해왔다. 그 가운데 최근 흥미로운 사례가 바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수가없다>다. 그는 영화에서 미술 파트 ‘분재’를 담당했다.
흥미롭게도, 주인공 만수(이병헌)의 취미는 원래 분재가 아니었다. 그러다 인물의 집요함, 통제 욕망, 내면의 긴장을 드러낼 수 있는 오브제를 찾는 과정에서 분재로 방향이 바뀌었고, 유 교수는 이에 맞는 분재를 직접 설계하고 선별했다. 영화 속에는 유 교수의 분재 인생을 관통하는 상징적인 나무가 등장한다. 원래 시나리오에는 없던 장면이었지만, 박찬욱 감독이 하나의 분재를 보고 새로운 컷을 만들어냈다. 극 중 만수의 아들이 거대한 나무 아래 앉아 있는 장면— 실은 작은 분재를 40배 확대해 CG로 구현한 것이다. 그 나무는 유 교수가 젊은 시절 스승의 수업에서 만났던 ‘나무’에서 시작된다.

“30년 전에 스승님이 회원들 실습용으로 쓰셨던 나무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시간이 흘러 10여 년 전에 우연히분재 경매장에 갔는데, 세상에… 엉망진창이 된 나무 몇 그루가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보는 순간 알겠더라고요. ‘이거 그 나무다.’”

남들이 보기엔 엉켜버린 가지와 방치된 흔적뿐인 ‘애물단지’였다. 그러나 그는 그 속에서 스승의 손길과 시간의 흔적을 읽어냈다. 그는 나무를 모두 사들였고, 망가진 것들 중에서도 다시 살려낼 수 있는 몇 그루만 골라, 지금의 대표작을 만들었다. 스승의 손길이 닿았던 나무를 제자가 다시 되살리고,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훗날 스크린 속 거대한 존재감으로 다시 태어난 셈이다.

‘죽은 나무’에서 시작된 새로운 숲

유수형 교수가 추구하는 분재의 미학은 한 마디로 ‘자연미’다. 특히 그는 척박한 환경에서 겨우 살아남은 나무, 혹은 이미 죽어버린 고사목에서 강한 영감을 받는다.

“20대 때 지리산 종주를 했는데, 천왕봉 밑에 고사목 군락지가 있었어요. 불에 타 죽은 큰 나무들 사이로 작은 나무들만 남아 있었는데, 석양 속 그 풍경이 잊혀지지 않았어요. 30년쯤 지나 다시 가봤더니, 그때 보았던 고사목들은 거의 다 사라졌더군요. 죽은 나무들은 결국 비바람에 썩고 부서져서 사라지는 게 자연이니까요. ‘아, 이게 자연이구나. 죽은 나무마저 시간 속에서 사라져 가는구나’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죠.”

그 장면은 그의 안에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훗날 일본의 한 분재원에서 죽은 나무 더미를 보았을 때,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유 교수는 고사목들을 한국으로 가져와 살아 있는 나무와 함께 한 화분에 심어, 지리산의 기억을 작품으로 옮겼다. 이 작품 또한 영화 속 만수의 온실 세트에 놓이기도 했다.

“보통은 죽은 나무는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근데 저는 그 죽은 나무에서 또 다른 풍경을 봤어요. 그래서 살아 있는 나무를 접목해서, 돌판 위에 하나의 숲처럼 다시 구성했어요.”

죽은 줄기로는 바람과 시간의 흔적을, 살아 있는 새 가지와 잎으로는 다시 시작되는 생명을 보여주는 작업. 그에게 분재는 ‘살아 있는 나무만 아름답다’는 통념을 뒤집는 예술이다. 이런 시선은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자생식물을 지키고, 산불과 기후위기 속에서 종자를 보전해 다시 숲을 일으키려는 한수정의 역할과도 통한다. ‘죽어가는 숲’이 아니라 ‘다시 일어설 숲’을 상상하는 관점이다.

나무를 아는 조경 예술가, 사유원에서 배운 것들

유수형 교수는 한때 5년 동안 대구 ‘사유원’의 기반 조성 프로젝트를 총괄했다. 사유원 회장은 수집한 나무들을 맡길 사람으로 ‘나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나무를 정확히 알고 옮겨 심고 관리해줄 사람, 그 역할을 맡은 이가 유 교수였다. 그가 현장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한 일은 ‘땅 속’을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조경하는 사람들은 흙 위의 나무를 주로 보지만, 저는 분재를 했기 때문에 흙 아래 뿌리를 먼저 봅니다. 뿌리의 모습만 봐도 이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또 건강 상태를 알 수 있거든요.”

그는 수십억 원이 드는 토목식 조경 대신, 흙과 지하수 흐름을 먼저 읽고 기반을 다지는 방식을 선택했다. 좋은 흙을 덮어 씌우기보다 기존의 토양 조건을 살리고, 물길을 조정해 나무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전략이었다. 그중 가장 상징적인 사례가 리기다소나무 숲이다.

“20만 평쯤 되는 산의 80%가 리기다소나무였는데 ‘쓸모없는 나무’라며 모두 베어내고 새로운 경관을 조성하자는 얘기가 있었어요. 저는 오히려 간벌과 가지치기를 제안했습니다. 잘라낼 나무와 살릴 나무를 일일이 고르며 공간과 거리감을 조절해, 결과적으로는 거대한 침엽수 정원을 만들어냈습니다. 산을 갈아엎는 대신, 나무 하나하나의 장점을 찾아 살리는 방식으로 숲을 다시 설계한 사례죠.”

그의 철학은 분명하다.

“완벽한 나무는 없습니다. 각자 가진 장점을 찾아 살려주는 것. 그게 제가 배운 자연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이 경험은, 기존의 숲과 토양을 ‘리셋’하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환경을 존중하며 새로운 경관을 만들어가는 K-정원의 방향성과도 맞닿아 있다.

분재와 K-정원, 그리고 한수정이 만나는 지점

유수형 교수는 한국 분재의 차별점을 ‘자연미가 더 극대화된 형태’라고 말한다. 일본 분재가 정교하게 정형화된 미를 추구한다면, 한국 분재는 문인목(文人木, 선비나무), 모아 심기처럼 여백과 비정형성을 살린다.

“분재의 본질은 자연이고, 그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이 한국과 일본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은 본래 ‘자연스러운 미’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조금 더 거칠고 자연스러운, 원래 거기 있었던 것 같은 모습에 마음이 더 갑니다. 자연은 결국, 사람보다 더 길게 살아남는 존재예요. 우리가 할 일은 자연을 통제하는 게 아니라, 그 곁에 앉을 자리를 만드는 거죠.”

이는 한수정이 말하는 ‘자연과 사람을 연결하는 K-수목원·정원’의 방향성과도 같다. 척박한 환경을 이겨낸 나무의 모습에서 회복의 서사를 읽어내고, 죽은 나무마저 새로운 작품과 숲으로 되살려내며 공존의 경관을 만드는 태도. 한수정이 자생식물과 종자를 지키며 기후위기 속에서도 지속 가능한 정원문화를 만들려고 하는 지향점과 닮아 있다. 유수형 교수의 분재는 그 철학을 작은 화분 안에 압축해 보여주는 또 하나의 ‘K-정원’이라 할 수 있다.

이색 토크서로를 생각하며
케이크를 빚는 시간
한수정 직원들의
플라워 케이크 만들기
한수정 FOCUS자연과 사람을 연결하는
K-수목원·정원의 글로벌 허브로